여기, 이 자리에 새벽 1시에 눈을 뜬 다음, 잠들지 않고 밤을 지샌 소년이 있었다. 그의 옆에는 책 수십여 권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일렬로 늘어세울 경우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에 쌍둥이 탑을 세웠다.
비행기가 날아와 부딪혀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탑이었다. 탑의 최상층에는 장식용 소품에 해당할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반지, 목걸이, 팔찌, 머리핀, 기타 등등. 이것들은 오직 단 한 명의 주인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 주인은 소년의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뭐야, 너 벌써 깬 거니?" 다리 하나를 다리 하나 아래에 깔고 앉은 채 소녀는 소년의 눈을 쳐다보았다.
"안 돼요, 안 돼. 착한 어린이는 밤에 잠을 자야 몸도 쑥쑥, 마음도 쑥쑥 자라는 법이란 말이에요."
소년은 기가 막혔다. 물론 자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물만 주면 자라는 식물과는 달리, 성장판이 닫힌 지 적어도 십여 년은 되었다. 정확한 나이는 차마 입밖에 낼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몸은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은 이미.......
"알아요, 알아. 네 마음이 불꺼진 모니터 액정보다 더 시꺼멓다는 것 정도는."
소년의 눈초리를 의식한 탓인지 소녀의 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동시에 왼손으로 책 하나를 집어 든다. "이거 읽어봐. 너 일전에 조왕할미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꽤 재미있는 얘길 했잖아? 이 책에 나오는 설화 중에 왠지 신경쓰이는 부분을 발견했거든."
"확실히, 그랬지."
소년은 책을 받아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 사이로 책이 오가며 미묘한 간격을 두고 두 손끝이 스쳐 지나갔다.
"몇 쪽이야?"
소녀는 심술궂은 표정을 짓는다.
"직접 찾아봐. 여차하면 처음부터 죽 읽어봐도 좋고. ......넌 책을 쌓아두기만 하고 다 읽어 보진 않잖아. 그래서 내가 널 대신해 시간을 내어 이 흉물스런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읽어 주고 있는 참이지. 내가 지적한 책들은 꽤 괜찮은 책들이야."
"친절하기도 하셔라."
"그리고 <천지령> 같은 이상한 물건은 사오지 마. 표지만 봐도 종이 아까워질 내용이란 걸 짐작할 수 있잖아?"
"그냥 천상... 어쩌고 하는 사람이 썼다길래 알면서도 좀 궁금했거든."
"궁금해 하지마. 알아보려 하지마. 사려 하지마. 가져오려 하지마."
"알았어. 어차피 꼭 살펴봐야 한다는 물건들 살펴볼 시간도 별로 없는걸."
"알긴 아는구나?"
"게다가 요즘...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 확실히 위험하지. 꼴에 애들을 가르쳐 보겠다고 쓸데없는 일까지 벌리다니... 네가 봄버맨이야?"
"으...... 확실히 그 말을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못하겠지만?"
"해보겠다는데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어서."
"지켜볼 수 없어서?"
"...그래서 조금씩 도와주기로 한 거지."
소녀는 눈쌀을 찌푸렸다.
".......우리 말야,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일심동체가 되고 말았어,"
"전혀 기쁘지 않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잠시간 침묵했다. 마침 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치고 지나갔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녀가 말했다.
"너, <눈의 여왕> 각색해 볼 생각 없어?"
"눈의 여왕?"
"안데르센 동화 말야."
"어떤 식으로?"
"너다운 방식으로."
"그럼, 동화의 주된 독자층이 합법적으로 살 수 없는 물건이 될 거라고."
"알긴 아는구나."
"물론이지, 따라서 난 논문을 쓸 때나 이야기를 쓸 때나 기타 어떤 창작을 할 때에도 가능한 한 내 본성을 숨기는 방침을 가지고 있지."
"그건 다행인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든. 현대 동화에서 음습한 전개 해봤자 남는 건 창고에 쌓이는 재고들 뿐일 터이니까."
"그러면 말야......."
"응?"
소녀는 몸을 일으켜 소년의 등 뒤를 반 바퀴 돈 다음, 소년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소년의 얼굴이 발갛게 변할 만큼 부끄러운 얘기였던 모양이었다.
"정말 써도 돼?"
소년이 재차 물었다.
방금 들었던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물론이야, .......게다가, 너만 부끄러운 것도 아닐 터이니까."
소녀는 양뺨에 보조개를 띄운 채, 깜찍한 얼굴로, 이윽고 활짝 웃으며 여전히 의뭉스러워 하는 소년의 입술에 조그맣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화답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방에서 크고작은 두 마디가 터져 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쪽팔리잖아. 그냥 내일부터 쓰면 안 될까?"
"안 돼. 새나라의 어린이는 그날 할 일을 미루지 않는 법이거든."
0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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